두 아이의 미국생활

작은 아이 세례 받던 날.

김 정아 2004. 4. 12. 03:44

나연이가 오늘 세례를 받으면서 우리 가족은 이곳에 와서 모두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아이들에게는 성인이 되어 스스로 종교를 선택할 때까지 어느 종교던 강요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첫 영성체 반에서 공부했고, 같이 공부한 아이들이 세례를 받는 날인데 특별한 이유없이 저지할 필요가 없었다.

 

나중에라도 난 천주교가 싫으니 다른 종교를 갖겠다 해도 난 아이의 의견을 존중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교회 다니세요?라고 묻지 않는다.

 

어느 교회 다니세요?라고 묻는다.

 

한인사회에서 교회를 다니고,성당을 다니는 것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필수 사항이다.

 

종교 조직 내에서 많은 정보를 얻고, 한인으로의 정체성도 찾고,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확실한 매개체 역할을 톡톡하게 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아이가 우리를 따라 천주교 신자가 되는 날인데도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하다.

 

대학 다니는 4년 동안 난 불교 학생회 활동을 무척 열심히 했었다.

 

졸업한지 올해로 17년이지만 내 대학생활의 추억은 거의 대부분이 불교 학생회에 대한 기억이다.

 

한여름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일주일간 떠났던 전국 사찰 순례,전국 대학생 불교연합 축제에서 수배령이 떨어진 젊은 스님과의 만남, 밤을 세워가며 갑사, 동학사, 신원사에서 만들었던 초파일 연등, 불온한 서클의 長이라고 해서 학생처에 끌려갔던 일, 3박 4일씩 이어지던 정기수련회, 결핵병원의 불교 환자들을 찾아 다니며 자원 봉사했던 일, 한동안 나 좋다며 따라다녔던 지금은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서클의 선배, 학교 방송국에 손님으로 출연해 방송했던 일, 모두 다 나에게는 주옥 같은 추억이다.

 

내게 살아가는 의미가 되었고 한동안은 승가대학을 한 번 가 볼까도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졸업과 동시에 교사 발령을 받으면서 더 이상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었지만 내 정신적인 근원이 불교임은 한 번도 잊어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난 현실적인 이유로 종교를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어느 조직에든 들어가 하루라도 빨리 이곳 생활에 적응해야 하고, 아이들에게 같은 또래를 만들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천주교가 우리에게 더 나을 것 같다

는 판단아래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고 세례를 받았다.

 

솔직히 나는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없다.

 

멜 깁슨 작품의 예수의 수난이라는 영화를 구역 사람들이 단체로 보러 가기로 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면 그 영화는 보아야 된다며 같이 가자고 권유했지만 차라리 난 아이들을 봐 주겠다고 해 그날 영화 보러 간 사람들의 아이들을 돌봐주었다.

 

신부님의 영명 축일이라고 신부님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적으라고 했을 때 난 묵주기도 7일을 하겠다고 써 냈으나 아직 4일 밖에 못했다.

 

벌써 한 달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약속을 못 지키고 있으니 그것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빠른 시일 내에 약속은 지킬 것이다.

 

한동안 마음 속에서 잊혀졌던, 첫 종교를 져버렸다는 생각이 나연이가 세례를 받으면서 다시 생각나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한다.

 

그러나 다시 내가 선택한 종교이기에 성실하게 주어진 삶을 살 것이다.

 

*제일 윗사진은 부활절 계란 장식한 것입니다.

우리 구역 계란을 우리 집에서 만들었는데 모든 구역 가운데 제일 예뻤습니다.

 

 

a1

 

z1

 

a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