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의 미국생활

미국에서 내가 한 가장 큰 행사-생일파티 치르기

김 정아 2004. 1. 25. 00:52

내일은 원석이  생일이다.

 

한국에 있을 땐 겨울방학이어서 다른 친구들 많이 하는 생일 파티를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다. 돌 잔치 한 번만 근사하게 해주었는데 당연히 아이는 기억에 없다.

여기 와서는 겨울 방학이 아니기 때문에 생일 파티를 해 달라고 졸랐다.

 

우리도 양심이 있지 한 번도 안 해준 게 미안하기도 하고, 여기저기 친구들 파티에는 참석하면서 자기 생일에 초대 안 하는 것도

염치 없는 일 인 것 같아 이번에 딱 한 번만 해주기로 약속을 했다.

 

한국에서라면 남편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상의를 할 필요도 없이 내가 다 알아서 했겠지만 여전히 나의 영어는 의사 불통 상태이다.

 

한 달 전쯤 남편과 laser quest에 가서 예약을 했다.

레이저 총을 쏘고 점수가 나오고 하는 게임 장소이다. 남자 아이들이 너무나 열광하는 곳이고, 가장 파티하고 싶은 장소라고도 한다.

 

첫 해에 해 달라는 파티를  정말이지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엄두가 안 나 지금까지 미루어 온 게 사실이다.

초대장을 어디에서 사는 것인지, 장소를 어디로 정해야 할지, 나중에 집에 돌아가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작은 선물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서, 그것은 즐거운 파티가 아니라 차라리 두려움으로 다가 왔었다.

 

그러나 그 간 보고 들은 것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경험으로 알아지는 것들이 많으면서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생일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 줄 선물 팩을 챙기는 것도 ,초대장 보내고 확인하는 것도, 케잌을 주문하는 것도 그럭저럭 내 힘으로 할 수 있었다.

 

모처럼 이번에는 아빠가 아이 생일에 같이 참석 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느끼는 부담은 한결 줄었다.

그러나!

내 남편은 아이 생일 예약한 날짜도 잊어버리고 덜컥 로스엔젤레스 출장을 잡아버린 것이다.

 

나중에 알고 비행기 시간을 연장하려 하였으나 이미 꽉 채워진 스케줄을 절대로 연기할 수 없어 남편은 자기 발등을 찍으며 후회를 했으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불어 모처럼 남편 덕을 좀 보려 했던 나도, 미국아이 다섯 명과 한국어를 못하는 세 한국 아이들을 care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야지 어떻게 해.

그래서 미국 아이들은 내 차로 모두 태우고 가고 한국 아이들은 각자 부모들에게 데려다 달라고 했다.

 

미국 엄마들이 와서 같이 있게 되면 아마도 나는 진땀을 계속 흘려야 할 것 같아 미국 부모의 출입을 미리 차단한 것이다.

리고 친한 친구 태희의 도움을 받고 언어가 안 되는 부분은 원석이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게임 장에 도착했다.

게임 장 안은 아이들의 열기로 후끈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원석이 친구들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설레임이 가득했다.

 

한 게임을 하고 나온 아이들의 얼굴엔 땀이 범벅이 되어 있었고 너무나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두 게임을 모두 하고 나와 점수를 확인해 보니 원석이는 자기가 오늘 총 인원 중 1등을 했다고 너무나 즐거워했다.

 

파티 룸에 들어가 주문한 피자와 케익을 먹고 아이들이 가져온 선물들을 개봉했다.

모두 원석이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이 웃음이 가득하다.

파티를 모두 끝내고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 주고 오니 다리에 힘이 죽 빠진다.

 

내가 이 곳에 와서 한 일 중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과제를 끝낸 기분이다.

이런 일에 긴장을 풀고 안도의 한 숨을 쉬는 내가 어쩐지 우습다.

하지만 문화가 다른 미국 땅에 사니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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