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23금요일~24토요일
스티브 집에 새벽 6시에 도착해 잠시 눈을 붙이다 8시 30분쯤 일어났다.
전화도 없는 스티브 별장은 휴양의
의미보다 피난의 의미를 가지고 지은 집이라 했다. 그래서 외양도 그다지 예쁘거나 멋지게 지어지지 않았고 집안의 방도 침대 8개가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그래서 우리 (우리 식구 4명, 유학생 3명, 친구가족4명)이외에도 스티브의 친구들 가족이 무려 18명이나 먼저
대피해 있었다.
피난하지 않을 때는 제발 몸이라도 성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이제 허리케인에 대한 걱정을 안 해도 되는
이곳에서는 서서히 집안의 가재도구들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휴스턴에서 2시간 30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이곳은 별천지 같았다.
몸을 피신한 사람들은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농기구용 자동차를 타는 사람, 자전거를 타고 숲 속을 오가는 사람들로 마치 휴가를 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깊은
숲 속에 들어앉은 집이라 무섭게도 새끼전갈들이 오가고 있는 것만 빼고는 우리를 대하는 스티브의 미국친구들도 아주 친절했고, 미국음식과 한국음식을
서로 바꾸어 먹으며 음식 평가를 하기도 했고, 스티브는 아이들을 창고에 데리고 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 주기도 했고, 난 스티브 부인과 쇼핑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휴스턴에 막강한 리타가 상륙한다는 토요일 새벽이 되었어도 스티브의 별장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가 계속되었다.
텔레비젼을 켜 놓고 보니 우리 지역엔 큰 피해를 입지 않은 것 같다.
친구들에게 전화해 상황을 물어보니 비는
안 오고 바람만 세차게 불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말리는 스티브를 뒤로하고 우리는 휴스턴 행을 강행하기로 했다.
피난을 할 때는 분산되었던 자동차 행렬이 거의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면 우리는 또 길가에서 엄청난 시간을 낭비할 것
같아서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방도로를 타고 고속도로에 올라왔는데 정말 다행히도 차량이 별로 없는 것이다.
토요일 9시 현재 부시 대통령은 피난민들에게 아직은 위험 요소가 도사리고 있으니 돌아갈 때가 아니라고 연설을 거듭한
효과가 있었던 듯하다.
70마일에 속도를 맞추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정오 1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2시간 30분의 거리를 딱
2시간 30분 걸려서 왔다.
2시간 30분을 달리면서 우리는 길가에 잠시 버려진 차들을 30대도 더 만났다.
기름이 없어서 더 가지 못하고
차를 버려 두고 걸어서 탈출을 했던지, 아니면 동행한 다른 차들을 얻어 타고 갔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난감함과 막막함을 짐작하고도 남을
것 같다.
그리고 고속도로 주위로 버려진 쓰레기들도 전쟁후의 참상 같은 느낌을 주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이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었다.
그러나 도로표지판 몇 개가 나뒹굴고 있었을 뿐 날아간
지붕하나 없고, 파손된 담장 하나 없고, 깨진 유리창 하나 없고, 부러진 나무 가지 하나 없을 정도였다.
피난을 떠나기 전의 그 모습
그대로 우리를 맞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피난을 가지 않아도 되었을 뻔했다고도 말한다.
정말 불행하게도 이런 상황을 다시 만난다면 나는
또다시 탈출을 할 것이다.
텔레비젼을 보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급박한 공포, 생사의 갈림길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다신 맛보고
싶지 않다.
아마 대피를 하지 않았다면 극도의 긴장감으로 십 년은 더 늙어버렸으리라.
알고 있는 주위의 모든 친구들이 안전함을 확인한 오늘, 아주 편한 마음으로 밤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브의 피난용 별장입니다.
*마치 휴가를 나온 듯 아이들은 저런 자동차를 타고 놀았습니다. 피난 온 차량들이 많이 보이지요?
*평화로운 시골길을 따라 스티브의 집이 지어졌습니다. 마켓까지 나가는데 시간이 꽤 거리는 시골입니다.
*기름 떨어진 차들을 길가에 버려 두고 탈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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