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거나 슬프거나..

중국인과의 긴 대화

김 정아 2003. 11. 6. 12:26

6월 2일 일요일

원석이 얼굴 다친 이후로 오랜만에 수영장에 갔다.

일주 전 어스름한 운동장에서 롤러를 타다가 돌에 걸려 완전 뒤집어져 얼굴이 흉측할 정도로 까지고 피가 났다.
혹시 더운 여름에 곪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아빠가 지극 정성으로 약바르고 매달린 덕에 많이 나았다.

수영을 배우지 않고도 혼자서 터득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제법 그럴싸한 폼으로 왔다 갔다 하더니 재미가 붙어 계속 수영장에서 살았으나 얼굴 다친 이후로 집안에만 있다가 하도 졸라서 데리고 왔다.

잠시 후 원석이와 같은 학년인 중국아이가 아빠랑 같이 와서 수영을 하고 나는 졸린 표정으로 멍하니 있는데 중국아저씨가 말을 걸어온다.

영어로 한국인이냐고 묻고 어디 사는지 묻는다.

중국어로 대답을 해 주었다.

이 아파트에 중국어 할 줄 아는 한국인이 있다고 하더니 바로 당신이냐며 너무나 깜짝 놀라하며 반가워한다.

놀란 건 내가 더 놀랬지.

어느 새 내 소문이?

지난 번 수영장에서 5학년 짜리 중국 남자아이와 그 엄마하고 몇 마디 나누었을 뿐인데.

그 사람이 '朝鮮'이라는 漢字를 쓰려다 헷갈렸는지 헤매기에 내가 써 주었더니 놀란 눈으로 나를 다시 한 번 쳐다본다.

"당신 한자도 쓸 줄 아냐"고 중국어로 묻는다.

"나 한자 많이 읽고 많이 쓸 줄 안다. "

"당신네 나라 모든 사람이 한자를 다 쓸 줄 아는가?"

"그렇진 않다. 나는 특별히 한문 공부를 많이 했다."

"당신 나라말에 한자 많이 있는가?"

"아주 많다."

자기는 한국 친구들이 아주 많이 있다고 한다.

아주 친한 친구가 올 봄에 서울로 돌아가서 많이 슬프다고도 했다.

내가 궁금한 것들을 여러 가지로 묻자 수영장에서 나와 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버린다.

그래서 아주 많은 대화를 나눈 것 같다.

거의 30분쯤 .

말 하다가 안 통하면 서로 한자를 써가면서, 내가 중국어 발음을 틀리게 하면 가르쳐 주어가면서.

직업이 뭐냐고 물었더니 지구석유회사에 다닌다고 한다.

텍사스 주가 워낙 석유화학단지가 유명하니 내가 생각하기에 중국 정부에서 파견된 그 방면에 꽤 유능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아이들 이야기에 summer school 이야기에 일본의 한자 이야기에 생활 이야기며 가지가지 잡다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 사람이 말하는 중국어를 거의 다 이해 하니까 날더러 중국어는 언제 그렇게 많이 배웠냐고 다시 놀란다.

차마 전공이라는 이야기는 창피해서 못하고 대학 때 조금 배웠다고 했다.

당연히 대만 사람인줄 알고 대만에서 왔냐고 물었더니 북경에서 왔다고 한다.

북경과 북경어.!

나의 희망과 꿈의 대륙이자 가장 습득하고 싶은 1순위 언어.

정말 친구하고 싶어졌다.

대만 사람이야 도처에 있지만 북경에서 온 사람이라니 .

앞으로도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결코 흔치 않을 것이다.

1가정 1자녀 원칙이 재외 국민에게도 적용되는지 딸 아이 하나밖에 없었다.

남아 선호 사상이 우리 보다 더 깊은 중국인이 우리 아이들을 보고 너무 부러워한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있어서 너무 좋겠다고 한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제 그만 집에 가고 싶어진다.

이제 이야기 할 내용들이 모두 바닥 나 버렸다.

뭔가를 더 물어보면 대답을 못 할 것 같다.

아이들을 재촉해 신발을 신기고 타월을 걸치게 하고 "再見"하고 돌아서는데 너무 아쉽다.

자기가 중국어를 가르쳐 줄 수도 있다고 했는데 어쩜 우리 이사갈 지도 모르니까.

제발 이사 가는 곳에 북경인은 고사하고 대만 사람이라도 살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