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거나 슬프거나..

존경하던 이의 마지막 가는 길에.

김 정아 2007. 7. 17. 00:41
 

2007년 7월 15일 일요일

이곳에 산 지 6년이 되어가니 내가 느끼는 슬픔의 폭도 자꾸만 넓어져 가는 느낌이다.

예전엔 누가 어디서 사고를 당해 숨졌더라, 누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해도 그것은 나와 전혀 관계없는 남의 일이었다.

내가 몸담고 있는 곳이 좁았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요즘 자꾸만 주위에서 슬픈 일들이 일어난다.


어제 원석이를 친구네 집에 데려다 주려고 운전하는 중에 대만 친구 위니의 전화를 받았다.

찌찍거리는 음성 속에 간단히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위니는 나에게 “Mrs. Janet passed away"라고 말을 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어 내가 긴장해 잘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물었지만 역시나 대답은 똑같았다.

너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방사선 치료 과정이 힘들거라고, 다시 학생과 선생님으로 만나기는 힘들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다시 교실에서 만나기는 힘들더라도 그 힘든 과정 이겨내고 가끔 안부나 묻고 살기를 그렇게 바랬는데.

5월에 병문안 가서 그 힘들어 하는 모습 보고 가끔 안부편지라도 드리려고 주소까지 적어왔는데 오늘 내일 편지 한 번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이었는가?

5월 방문이 우리와 자넷의 마지막이었단 말인가?

미국의 유명한 암 치료 병원에 다니는데 무슨 큰일이야 있겠는가 했었다.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힘든 몸으로 3월에 남편과 유럽 여행을 다녀왔었는가?


집에 와서 다시 위니와 통화를 해서 도서관에 같이 다니던 ESL 친구들과 만나서 마지막 가는 길을 전송하기로 하고 오늘 다녀왔다.

자넷은 결혼 때 입었던 드레스를 입고 이쁘게 화장을 하고 반지도 끼고 안경도 쓰고 고요하게 관속에 누워있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것 말고는 살아생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자신의 친 자식이 없는 자넷의 조문 행렬은 조촐했다.

죽음 앞에 자식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그래도 외로워 보여 눈물이 났다.

자넷의 남편과 인사를 나누고 오클라호마에서 내려온, 우리와 안면이 아주 많은 자넷의 언니와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다.

임종 즈음에는 고통이 없었다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상태가 안 좋아져 임종 전에 가족들이 모두 다녀갔다고 했다.


자넷은 내가 만난 미국인 중 가장 선하고 좋으신 분이었다.

아마 앞으로는 자넷 같은 분을 더 만날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한평생 착하게 살다 갔을 자넷을 주님은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고통 없는 곳에서 편히 쉬고 계실 자넷을 위해 다시 기도한다.

‘아무 걱정 없는 그곳에서 이제 편히 머무소서!’


*미국인의 장례식은 한국과 아주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장례 전날도 검정 옷을 입고 가지만 미국은 아주 자유롭더군요.

자넷의 언니조차 빨간 검정 꽃무늬가 들어간 남방을 입고 왔고 다른 사람들도 하늘 색, 분홍색등 색깔 있는 옷을 입었더군요.

한국은 눈물도 많이 흘리고 침통한 분위기지만 이곳은 농담도하고 웃기도 하고 그러데요.

기독교 문화에 바탕을 둔 이곳의 장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곁에 머무는 것은 또 다른 축복일 테니까요.

가기 전에 우리는 무엇을 준비 하여야 할까 고민이 많았어요.

고민 끝에  봉투에 돈을 걷어서 갔는데 아무도 돈을 받지도 않고 내지도 않더군요.

마침 도서관장 낸시가 와 있어서 물었더니 평소에 고인이 생각했던 곳에 기부를 하는 거라고 하네요.

자넷은 암 센터와 몇 곳에 기증하라고 했다는군요.

그 몇 곳 중에 우리가 같이 공부하던 도서관도 있어서 우리는 도서관에 자넷 이름으로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도서관에서 책을 사서 책 표지에 자넷이 기증한 도서라고 써서 비치한다고 하더군요.

죽음마저도 사회 환원으로 돌리는 이들의 문화에 새삼 감동했습니다.

 

 

 

병문안을 가다 http://blog.daum.net/kja65/10235902 

 

 *지난 5월에 병문안 가서 찍은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