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거나 슬프거나..

교직생활 14년을 돌아보다 끝.광명의 한 중학교-(99~02년2월)

김 정아 2006. 3. 17. 01:47

광명의 한 여중에서 4년을 근무하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로 발령을 받았다.

걸어서 5분 거리였다.

아침 출근 시간도 여유 있고 ,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를 위해서도 참 좋았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의 학부모들은 또 내 학교의 학부형들이기도 해 행동에 제약이 많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동네 슈퍼를 나가도 거울에 얼굴 한 번 비추어 보아야 되었고, 더 이상 슬리퍼를 끌고 다닐 수도 없게 되었다.

첫해에 2학년 담임은 별 탈없이 그런대로 한 학년을 보낼 수 있었다.

마음 맞는 2학년 담임들, 순하고 착한 아이들로 일년이 잘 지나갔다.

 

그러나 그 다음해 다시 맡은 2학년은 내 교직 생활 중 가장 힘들었다.

아이들에게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고 내가 교사가 된 것을 매일마다 후회했다.

일주일에도 서 너 장씩 아이들의 발길질에 부서지는 사물함, 한 달에도 수없이 깨져 나가는 유리창들,학생부에서 타다 놓은 빗자루가 하루에 몇 개씩 부러져 나가고 청소함 문짝도 고치기가 무섭게 갈라져 나갔다.

결코 장난이라고 우습게 넘어갈 성질이 아닌 폭력 그 자체였다.

영어 선생님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영어 사전을 갈갈이 찢어 유리창 밖으로 내던지는 아이들, 초임교사도 아닌 중견 교사까지 울고 나가게 만들었던 반, 내 앞에서 교감, 그 새끼 어디 있어요? 내가 죽여버릴 거예요하며 악을 쓰던 아이, 시험 때마다 부정행위로 걸려오는 아이들, 담임인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우리 집 현관문에 붉은 매직펜으로 온갖 욕설을 써 놓고 갔던 아이들.

무엇이 아이들의 성정을 그렇게 거칠게 만들었는지 폭력성에 난 매일마다 속으로 울음을 삼켜야 했다.

그런 아이들로 학부모들과 수없이 많은 전화 상담을 했었고, 우리 반을 더 방치 할 수 없어 쉬는 시간마다 난 교실에 가서 앉아 있어야 했다.

내가 쓸 수 있는 수 많은 방법을 동원 해 봐도 아이들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학년이 끝날 때까지 내 반에 들어가 편하게 웃어본 기억이 별로 없다.

오늘은 무슨 일이 터질까 항상 긴장해야 했고, 일요일 밤이 되면 출근할 생각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모두가 교사로서의 자질과 내 능력이 부족했던 탓이고, 이렇게 떠벌리는 것도 사실은 너무나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어차피 지난 세월이고 사람이 좋은 추억만 가지고 살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니까.

40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지금까지  내 생애 중 가장 길고도 힘든 해 였다.

이제 그 아이들의 나이, 스물 한 살이 된 지금  그 폭풍의 시기를 지나고 아마도 훌륭한 성인으로 성장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다음해 3학년을 맡으면서 지난해의 힘겨움을 보상이라도 받듯이 너무나 착한 아이들과 1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보통은 거칠고 힘 있는 아이들이 반의 주도권을 잡지만 반 구성원들이 얼마나 좋은지 우리 반에서는 부정적이고 거친 아이가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일년 내내 수업 분위기 좋은 반이라고 선생님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는 반이었다.

 합창대회서도 이왕 할 것 근처의 교회를 빌려 피아노 반주 해가면서 연습하자는 아이들의 제안에 따라 학교 근처의 교회를 물색해 허락을 맡아 주었고, 아이들은 자발적으로 얼마나 즐겁게 했는지 모른다.

지휘를 했던 성현이 반주를 맡았던 은혜, 노래  여행을 떠나요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체육대회에서도 유일하게 반 티까지 맞추어 입고 한 마음이 되었다.

 

다른 반 아이들의 선생님 저도 4반 가고 싶어요하는 농담이 항상 기분 좋게 따라 다녔다.

나도 아이들을 위해 뭔가를 해 주고 싶은 마음이 항상 끊이지 않았다.

일요일에 체육 공원에 나가 반 단합 대회를 하기도 했고, 아이들이 너무나 간절히 원해 토요일, 일요일에 걸쳐 교장님 결재까지 받아 학교에서 야영을 하기도 했다.

일박 이일 야영이라는 게 사실은 너무나 큰 마음을 먹어야 되는 것인데 남편의 전폭적인 지지(남편도 덩달아 우리 반 아이들을 예뻐 해 도와 주겠다고 했다)로 쉽게 결정을 할 수 있었다.

비오는 구름 산에 올라 보물 찾기도 하고, 물 풍선 놀이를 하면서 옷이 젖어도 즐겁기만 했고, 스스로 지은 설익은 밥을 먹으면서도 행복해 했고 무서운 비디오를 본 후 학교 전체의 불을 끄고 귀신놀이를 했던 것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 때 아이들의 존경을 받던 국사 선생님이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해 컵라면을 준비해 와 아이들의 야영 기분을 더 느끼게 해 준 일도 기억이 난다.

그 국사 선생님은 내 블로그 1회부터 빠짐없이 읽어주시고 답글을 주시는 '푸른나무처럼'님이다.

새벽 5시쯤 잠든 아이들을 8시에 깨워 교실을 정리하자고 했을 때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일어나 불평 없이 침낭을 정리하고 교실을 청소하던 아이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였다.

학급 야영 이후 우리 반 아이들은 더욱 단합이 잘 되어 내 말을 더 잘 따라 주었다.

아침 출근길이 한결같이 가볍기만 하고 교실 들어가는 일이 신나기만 했던 해였다.

고입 시험이 가까워진 11월 말 아침 조회 시간에 한마디 했었다

이제 고입 얼마 안 남았는데 쉬는 시간이랑 점심 시간에 공부 좀 하지!”했는데 그 날 어떤 선생님이 와서 그러신다.

“ 4반 애들 이상해요. 점심 시간인데 아이들이 모두 교실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어요

이상해요? 뭐가 이상해요? 우리 반 애들 원래 그래요하며 턱을 쳐들고 거만한 농담을 하고 교실에 올라갔다.

정말 아이들이 수업시간처럼 조용히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고 그런 모습을 처음 본 다른 반 아이들은 우리 반 교실에 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복도에서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일차로 실업학교에 합격한 아이들은 운동장에 나가서 놀망정 교실에 앉아 다른 아이들 공부를 방해하지도 못했다.

나도 뭔가를 해 주어야 할 것 같아 내 쉬는 시간을 반납하고 나도 교실에 앉아 있어 주었다.

그 해가 내 교직 마지막 해였다.

내 마지막 교직 생활을 그런 아이들과 할 수 있어서 너무나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영원히 나에게는 좋은 추억이 될 테니까.

 

네 곳의 학교를 돌아 14년이 흘렀고 다시 복직할 것이라는 마음과 달리 휴직 4년을 포함해 18년의 교직 생활에 올 2월말로 사직서를 내고 마무리 했다.

 

교사를 하고 있는 친구들과, 친한 동료 선생님들과 전화를 할 때면 아쉬운 마음이 들 때도 있지만 난 지금 이 길에서 행복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