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거나 슬프거나..

교직생활 14년을 돌아보다2.-안양의 한 여중(92~95년2월)

김 정아 2006. 3. 7. 00:01

2006 3월 6일 월요일

결혼과 더불어 안양으로 자리를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

너무나 불행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는 학교라 재수 없는 학교’(난 이런 종류의 비속어를 너무 싫어한다.)라는 표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학교였다.

나보다 먼저 안양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한 친구는 내가 그 학교로 발령을 받았다니 왜 하필이면 그 학교냐며 걱정을 했다.

여 중생들을 태우고 수학여행 가던 버스가 전복되어 수 십 명의 사상자를 내어 한참 메스컴에 오르내리던 그 학교였다.

내가 근무하던 3년이란 짧은 시간에도 많은 선생님들이 가정적인 불행을 겪어 이혼을 하거나 별거를 하던 사람이 여섯 일곱은 되었고, 배우자를 암으로 잃어버린 선생님도 두분, 혈액 암으로 힘들게 투병하던 선생님의 남편, 그 당시 나와 스물 아홉 동갑내기였던 미모의 여선생님도 서른 살의 젊은 남편을 홀로 두고 췌장암으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한 여선생님의 갓 태어난 아이도 분만 도중 잘못 되어 많은 고통을 겪었다.

나 또한  이유 없이 병이 나 수술을 받기도 했었다.

 

몇 년 동안 중단 되었던 수학여행이 내가 부임하던 해에 다시 시작되었고 2학년 담임을 맡았던 나도 학생들을 인솔해 수학 여행을 다녀왔다.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교사들은 일말의 긴장도 풀 수 없을 만큼 조심조심했고 덕분에 아무 일없이 수학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세 번 째 해 내가 맡은 반 아이들은 어쩌면 그렇게 예쁜지 일년 내내 아이들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 되어 너무나 기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중간, 기말, 성취도 평가 등 평가란 평가에서 모두 1등 자리를 내 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체육대회에서도 월등한 성적을 보이면서 다른 반들의 부러움을 샀던 반이다.

심성도 아주 고와 어느 누구도 따돌림 당하지 않았고 누구를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일도 없었다.

우리 반에 정신지체 아이가 있었는데 특수 학교를 보내야 하는 상황에서 부모들이 일반 학교를 보내고 싶어해 우리 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아이를 처음으로 중학교에 보내 놓고 학부모는 언제나 노심초사 였을 것이다.

편지로, 전화로 대화를 아주 많이 했었는데 아이가 학교 가는 걸 너무 좋아한다며 감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내가 신경을 쓸 필요가 없을 만큼 반 친구들이 너무나 잘 도와 주었다.

소풍을 가도 그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다니고, 체육대회나 학교 행사에도 내가 말하지 않아도 꼭 챙길 만큼 아이들의 심성이 천사 같았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학부형들까지 나를 믿고 신뢰를 보내 주어 교사 학부모 학생들과의 삼위일체가 완벽하게 이루어졌던 해 였다.

광명에서 안양까지 통근이 힘들어 전근을 하게 되어 2월 마지막 날에 이임인사를 하기 위해 운동장 조회를 하고 학생들을 돌려 보내고, 전근하는 선생님들끼리 교장실에 들러 마지막 차 한잔을 하고 밖으로 나왔는데 이게 웬일인가?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우리 반 아이들이 집에 가지 않고 나와의 마지막 인사를 하겠다고 추운 운동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만큼 아이들이 고마워 모두 한 번씩 안아 주고 집으로 돌려 보냈다.

 

 

동료 교사들과의 관계가 아주 돈독해 국어, 한문과 교사를 중심으로 20대 후반이던 나를 비롯해 60세에 이르는 선생님까지 똘똘 뭉쳐 화기애애한 교직생활을 했었다.

긴 겨울 방학에도 아이들 데리고 만나기도 했고, 다른 학교로 모두 뿔뿔이 헤어졌어도 방학에 모임을 만들어 만나기도 했다.

지금도 많은 선생님들과 메일을 주고 받고 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인복은 타고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첫 아이를 갖고, 4.2키로나 되는 남자 아이를 낳았던 학교였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할머니 손에 맡겨지고 남들은 아이 키우는 게 힘들다고 때로는 불만을 말하곤 했지만, 난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직도 어리고 미숙한 엄마였다.

 

동료교사 8명 정도가 단체로 운전 교습소에 등록을 해 세 번의 실패 끝에 운전면허증을 딴 것도 큰 수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덕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교장실에 불려가 교장님께 혼나는 헤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8명이 한꺼번에 필기시험 본다고 가고, 실기 시험 본다고 나가버리면 수업을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었다.

우리가 바보도 아니고 개인적인 일 때문에  단체로 수업 결손을 내면서  운전면허에 매달리진 않을 것인데 관리자들의 마음은 또 그게 아닌 것이었다. 때마침 개교 기념일이 끼어 있어 100%필기 시험에 합격했고, 학생들의 기말고사  보는 날 오후로 운전실기 시험을 보았기 때문에 한 시간의 수업 결손도 없었다.

나처럼 몇 번씩 떨어진 사람은 방학을 이용했다.

크고 작은 불행한 일들이 계속되던 학교, 광명에서의 통근이 힘에 부쳐 근무한지 3년 만에 광명으로 전근을 하게 되었다.

 

*집 앞 화단에 핀 철쭉입니다. 사진 없이 올리려니 허전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