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2일 목요일
3월이 되면서 이상하게도 학교와 교실,학생들에 대한 꿈을 자주 꾸게 된다.
이미 퇴직서를 냈지만 웬일인지
아직까지 퇴직 통보를 받지 못하고 있다.
내일쯤 학교에 메일을 보내서 다시 한번 확인을 해 보아야겠다.
퇴직 발령은 받지 못했지만
이제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없다.
별다른 회한도 없고 아쉬움도 없고 후회도 없지만 내 젊음을 바쳐 몸 담았던 교직
생활을 돌아보고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다.
1988년 2월, 졸업식장에서 많은 분들이 축하를 보내주었지만 정작
졸업생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을 찾아 보기는 어려웠다.
극심한 교원적체 현상에서 교원 발령을 기대 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어찌 되었든 무슨
일이라도 찾아야 했다.
20여년 전 아주 시골이었던 우리 동네에서 난 여자 대졸자 1호였다.
아빠도
없는 가난한 살림에 딸을 무슨 대학까지 보내냐고 4년 내내 동네 사람들의 입 방아에 오르내리다 졸업을 했는데 놀고 있으니 주위
사람들의 눈초리가 만만치 않았다.
어느 날 경기도 교육청에서 전화 한 통이 왔다.
내일까지 (1988년 3월 8일)수원에 있는 도 교육청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임시교사 자리라도 생겼나 보다’라는 희망을 품고 기차를 타고 택시를 타고 찾아 간 자리에서 뜻하지 않게 정식 교사
발령 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강당에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니 같은 과 친구들이 대거 모여
있었다.
입은 옷에 달랑 핸드백 하나 들고 왔는데 포천으로 가라고 해 그날 큰 댁의 오빠와 큰 어머니와 함께 물어 물어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포천이란 곳을 찾아갔다.
너무나 낯선 곳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니 몸도 마음도 갑자기 추워졌다.
자취할 집을 구해 놓고 가재도구
몇 개를 장만하고 다음날(3월 10일) 교장실에 찾아가 인사를 드리고 드디어 4년간 꿈에 그리던 나의 교직생활을 시골의 한
고등학교에서 시작했다.
첫 수업으로 고 3교실에 들어갔는데 나보다 한 살 어린 스물 세 살의 남학생 두 명이 교실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데
그들의 나이에 쫄아 한동안 그 반 수업이 편하지 않았지만 또래보다 나이가 많아 오히려 내 입장을 잘 헤아리고 장난 치는 아이들도 제지해 주어
편해졌다.
중국어 전공, 한문 부전공인 나는 한문 교사로 발령을 받았지만 고등학교 국어를 두 반을 들어가야 했다.
한문에 투자하는
시간의 몇 배를 들여 열심히 교재연구를 해 가도 수업 내내 등에서 땀이 흐를 만큼 국어에 자신이 없었고 힘이 들었다.
그래도 학생들이
예뻤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이 너무 행복해 일요일이 되는 것이 싫었을 정도이다.
나에게 담임을 맡겨주면 아이들과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나에게는 담임을 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했었고 ,어느 반 담임이 못 나와 임시로라도 담임을 할 때면 너무나 신이 났었다.
결강이 났을 경우, 내 차례가 아닌데도 내가
들어가겠다고 자청을 할 정도였다.
주 18시간의 수업이 너무 적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24살의 어린 처녀 선생님을 얕잡아 봐 수업시간에 교실문을 박차고 나가 버려 그 아이를 찾겠다고 오락실을 뒤지고 다녔던 적도 있었다.
수학여행을 인솔해 갔을 때 술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아이들 때문에 진땀을 흘리기도 했지만 어렵고 힘든 일이 그 때는 어렵고 힘든지 몰랐다.
공부도 열심히 해 퇴근하고 의정부까지 논어 맹자를 익히기 위해 일주일에 두 세번을 나갔다.
멤버들이 50,60대 아저씨.30대 미혼녀들이어서 참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 땐 서로의 집들도 방문해 밥도 같이 먹고 했었다.
시간이 흐르고 동료들과 학생들과의 관계가 익숙하고 편해지면서 차츰 내 눈에 한 남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컴퓨터를 수리해 주는 컴퓨터 회사 직원 인줄 알았다.
훤칠한 키에 언제나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있는 그 사람이 내 시야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 내 눈은 그
선생님만 따라 다녔다.
출근하면서,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 들어오면서, 퇴근을 하면서 내 눈은 오직 한 사람만 향하고 있었다.
그
선생님 반에 들어가 수업을 할라치면 더 신이 났고 , 그 반 아이 문제로 일부러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 선생님과 상담을 만들기도 했다.
그
사람을 향한 열병이 심해져 휴일에 백화점에서 쇼핑하다가도, 길 거리를 걸으면서도, 버스에 오르면서도 혹시나 우연하게라도
만나지지 않을까 두리번 거리기도 했다.
그러다 의정부로 집을 옮겼는데 집 주인이 그 선생님의 먼 친척이었다.
내 운명이라
생각하며 너무 감사하고 기뻐했지만 그것으로 그만,더 이상 어떤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아주 친한 동료교사에게조차 말을 못하고 속앓이만
하다 결국 그 선생님은 결혼을 하고 말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그러고 말기를 너무 잘한 일이다.
물론 이유는 그 보다 더 멋진,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내 남편을 만났으니까.
교직 생활 4년 째, 아직도 햇병아리인 내가 고 3담임을 하면서 내 일생
최대의 생활 지도상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한 여학생의 만삭으로 불러오는 배를 감지해내지 못했다.
지극히 둔감한 나는 옆자리 아줌마
선생님의 눈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55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뒤를 일일이 따라다닐 수도 없었지만 내가
좀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 지경까지 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텐데라는 후회가 막급했다.
그래도 내가 위안을 삼았던 것은 한 방에서 잠을
자던 아이의 엄마까지도, 가정방문을 해 조심스럽게 이야기 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것이라고 해야 할까?
무사히 졸업은 시킬 수
있었다.
포천에서의 내 4년,수 없는 실수와 새내기 교사의 미숙함 투성이인 4년을 보내고 선배 교사의 소개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함과 더불어 안양의 한 중학교로 옮겨 새로운 교직 생활을 다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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