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쁘거나 슬프거나..

우체국에 가다.

김 정아 2005. 12. 8. 00:21

2005년 12월 5일 월요일

사표를 내고 여기에 남겠다는 소리에 양쪽 부모님이 모두 서운해하신다.
친정엄마는 밤새도록 마음이 허전해 잠을 못 이루셨다고 했다.
20년도 더 지난 그 옛날, 대학 1학년 1학기 등록금 한 번 내 주시고 친정아버지는 세상을 떠나셨다.

 

가장 맏이인 나를 포함해 자식 5명을 줄줄이 거느렸던 젊은 엄마는 고생고생 하가면서 억척스럽게 5남매 모두를 4년제 대학을 졸업시켰다.
시골에서 남의 농사일을 다니면서 감기에 걸려도 약 한 번 못 사 드시고 자식들 뒷바라지하며 자식들 커 가는 모습으로 고생도 고생인줄 모르고 사셨다고 했다.
그렇게 어렵게 고생해가며 대학 공부시켜 선생님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만둔다니 나만큼이나 마음이 허전하셨던가보다.
" 엄마, 그래도 내가 선생님이어서 건진 것 중에 가장 큰 것 있잖아요. 내가 교사가 아니었다면 김 서방 못 만났을 거야. 난 그걸로 본전 충분히 찾고도 남아요."
" 가만 보면 언제나 너 혼자만 짝사랑인 것 같더라. 김 서방도 그렇게 생각 하냐?"

어느 사이 농담으로 바뀐 대화 속에서도 엄마의 서운함을 읽을 수가 있었다.
" 애들 대학 보내 놓고 10년 후에 완전히 들어갈게. 그때까지만 기다려 줘요."
" 그 때 되면 나 죽고 없을 것이다"

 

 

 

어젠 시어머님께 전화가 왔다.
" 너 꼭 거기서 살아야겠냐? 원석이 걱정하지 말어라. 원석이 한국 와도 적응 잘 할 것이다. 내가 애들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다. 내 아들도 못 보고,  손주들도 못 보면 무슨 재미로 산다냐. 오면 내가 아이들 과외비 대마. 너도 몇 년만 더 하면 연금 받는데 아깝잖냐. "
"어머님, 저도 부모가 되어보니 제 자식들이 무엇보다 중요하네요. 저희가 사정이 허락되는 데로 한국에 자주 들어갈게요. 어머님이 이해해 주시면 마음이 편해 질 것 같아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잠시 또 미련을 갖고 이미 봉투에 들어있는 사표를 바라보며 서성거렸다.
그러나 하루 이틀의 결심으로 이루어진 일이 아니기에 과감히 봉투를 들고 우체국에 갔다.
성탄절을 앞둔 우체국은 우편물을 보내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국으로 가다가 혹시 분실 될 경우를 대비해 똑같은 서류를 두 장씩 만들어 넣어진 편지봉투 두 통을 보내고 돌아왔다.
시원섭섭하다.
느낌이 약하긴 하지만 뭐라고 표현 할 수가 없다.

 

*마음이 뒤숭숭해 올해는 성탄 장식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방에 앉아 있으니 천정 쪽에서 무슨 소리가 나서 나가 보았더니 글쎄 두 아이가 지붕에 올라가 등을 달고 있었습니다.

전 놀라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작년엔 아빠가 2층 사다리 빌려 2시간 가까이 힘들게 설치했는데 어린 것들이 지붕위까지 올라가 저러고 있는 걸 보고 다리에 힘이 다 빠졌답니다. 떨어진다고 내려오라 해도 안 내려 오더니 결국 다 해냈더군요.극성입니다.

 

 

 

 

*두 아이 덕분에 이렇게 불을 켜 놓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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