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야 놀~자

시부모님 한국에 돌아가시다.

김 정아 2003. 2. 7. 06:33

2003년 1월 13일 월요일

온몸의 신경들이 하나씩 풀리는 느낌이다.

지난 12월 11일 한국에서 오신 시부모님과 조카가 오늘 서울로 돌아갔다.

휴스턴 공항을 떠나 달라스 공항에 도착해 대한항공 티켓팅을 마치고 대합실에 앉아 계신다는 전화를 들으니 더욱 더 몸이 늘어진다.

모든 긴장이 풀린 탓이다.

결혼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부모님과 같이 살아 본 적이 없다.

결코 상냥하지도 않고 고분고분하지도 않고 무뚝뚝한 내 성격으로 인하여 좀 서운한 마음을 가지셨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결단코 사람에게 변덕을 부리지는 않는다.

우리 아이들과 남편은 아침, 점심을 집에서 먹지 않는다.

한국인들은 학교 가기 전 아이들에게 절대 김치를 먹이지 않는 걸 불문율처럼 지키고 있다.

마늘 냄새 ,생강 냄새가 심하게 나서 여기아이들에게 불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김치 없는 식사란 속없는 만두처럼 아무 의미가 없어 아침식사는 우유나 계란 후라이 ,빵, 과일 몇 조각으로, 그야말로 아메리칸 스타일로 하고 남편은 출장도 잦은 편이고 평소에도 저녁 식사를 밖에서 해결 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부로서, 그것도 전업주부로서 솔직히 부끄러운 고백이나 토요일과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밥을 하루걸러 한 번씩 한다.

그러던 것을 하루에 세 번씩 꼭꼭 뜨거운 밥을 해 내려니 그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침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돌아서면 점심 반찬은 무얼 하나 또 저녁은 무얼 하나 고민하는 것이 하루 중요한 일과였다.

그러나 그 일을 불평 없이 할 수 있었던 것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들을 너무나 즐거워하고 행복해하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너무나 굶주려 있던 아이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특히 큰 아이는 4세 때까지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그만큼 할아버지 할머니는 부모 이상의 존재였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를 먼저 부르며 뛰어 들어온다.

정서적으로 많이 풍요로와 졌고 충만함이 넘치듯 보였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고 오늘 아침 서로 작별인사를 하는데 큰 아이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울고 만다.

난 2시쯤 부모님을 모시고 휴스턴 공항에 갔다.

우리 남편은 언제나 중요한 때는 출장을 가버리고 없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로 어제 세인트루이스 출장을 가버리니 영어도 못하고 길눈도 어두운 내가 어쩔 수 없이 공항에 갔다.

제발 잘 도착해 체크인까지 마치고 무사히 집에 돌아오게 해 달라고 소리 없는 기도를 간절히 했다.

보통 때는 공항터미널 C에 도착하면 그만인데 이번엔 터미널 A다.

A에는 전일제 주차장밖에 없어 C에 주차를 해 놓고 구내 전철을 타고 A에 도착했다.

영어도 모르는데 어려운 것을 물어보면 어쩌지? 보통 전문 용어가 아닐텐데 중대한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실수해서 국제미아가 되면 어쩌지?

델타 항공이 보이자마자 가슴이 두근거린다.

피할 수 있는 상황은 절대로 아니고 누구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이 상황.

나 이외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도 없다.

믿자! 나를 믿자!

당당하게 자기 최면을 걸면서 프론트에 섰다.

그러나 가방이 몇 개냐는 질문 외엔 없어서 무사히 체크인을 마쳤다.

내가 너무 겁먹었다.

티켓팅을 해주는 센스 있는 사람이 두 노인과 어린이인걸 알고 내게 대합실까지 가겠느냐고 물어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운전면허증만 주면 된다고 했다.

검색을 마치고 게이트를 찾아 대합실까지 오니 한숨을 돌릴 만큼 안심이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없는데 엄마조차 없으면 아이들 상실감이 클 것 같아 서둘러 집에 돌아오면서 '낯선 외국 땅에서 내가 이런 일도 할 수 있구나' 라는 충만감과 기쁨이 마음속에 넘치며 스스로 내가 너무 기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