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9박 10일 간의 짧은 한국 방문

김 정아 2003. 3. 4. 03:55

2월 19일 -2월 28일

9박 10일이라는 짧은 일정으로 한국에 다녀왔다.

남동생의 결혼식이 있어서이다.

1년만에 한국에 나가는 것이 사치인 것 같기도 하고, 혼자서 비행기를 타야하는 것도 마음속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고, 회사 일 만으로도 너무나 힘들어하는 남편에게 어린아이들을 맡겨 놓고 가야하는 것도 마음에 안 놓여 갈 생각이 별로 없었고 집에서도 오지 않을 걸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보름 정도 남겨놓고 남편이 비행기표를 사 들고 와서 등을 떠미는데 버틸 재간도 없었고 오는 길에 엄마를 모시고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동의를 했다.

나보다 살림을 더 잘하고, 아이들을 더 잘 보살피고, 집안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 마음을 놓고 비행기를 탔다.

21일 어스름 새벽에 인천공항을 도착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가는데 뜨거운 한숨 같은 게 쉬어진다.

마흔 해가 가깝도록 살아온 내 땅이 너무나 살갑고 반갑게 다가온다.

드디어 친정에 도착해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온 내 가족들과 반가운 인사를 하고 얼마간의 휴식을 취한 뒤 23일 결혼식장에 갔다.

오랜만에 아들을 보는 엄마는 결혼식장이 가까워 올 때부터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허둥거렸다.

동생은 99년 에콰도로로 외교관 발령을 받은 이후 단
한차례 한국을 다녀갔고 우리 또한 한 번 다녀왔으니 참으로 오랜만의 해후다.

동생은 일주일 전 에콰도로 임기가 끝나고 바로 필리핀으로 부임해 필리핀에서 곧바로 결혼식에 참석하러 오는 길이다.

늠름한 동생의 결혼식을 끝내고 신랑과 신부가 시골로 내려와서 3일을 같이 지내고 그들은 신혼여행 겸 새 부임지 필리핀으로 발길을 재촉해서 떠났다.

엄마는 결혼식의 긴장이 풀렸는지 월요일 아침부터 끙끙거리며 앓기 시작했다.

감기 몸살이라 생각하고 약을 지어 드시고 누웠는데 어린 조카도 아프다고 학교에 못 갔지, 여동생도 열이 나고 배가 아프다며 직장에 출근도 못 했지, 결혼한 남동생도 설사를 한다며 화장실을 수시로 드나들지, 난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을 못했다.

월요일 하루 온종일을 앓고 난 엄마를 더 이상 볼 수 없어 병원에 모시고 갔더니 장염이라며 입원을 해야 한다고 해 수속을 밟아 개인병원에 입원을 했다.

병원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결혼식에 같이 갔던 엄마의 절친한 친구가 그 병원에 엄마랑 같은 증세로 입원을 해 있어 뭔가 의심이 자꾸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혼식에 참석했던 동네 분들에게 전화를 걸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장염증세로 입원한 사람이 4명이 더 있었고 다들 설사에, 고열에, 복통에 시달려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나 해 사돈댁에 전화를 해 보았더니 그 쪽도 많은 수가 입원하고 집단 장염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뷔페에서 음식을 준비했으니 음식을 먹은 많은 사람들이 겨울에 그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마음을 이루다 말 할 수 없었다.

당연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여서 큰 동생은 음식점 사장을 만나 조용하게 일을 해결했다.

음식값 환불과 입원환자들의 병원 비를 납부해 주는 걸로 원만하게 일을 마무리 지었으나 서로가 치르는 대가는 너무나 컸다.

엄마는 목요일 오후 한동안 혼수 상태에 빠져 우리 가족들을 너무나 당황하게 했다.

부랴부랴 종합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아 간신히 고비를 넘겼다.

심한 탈진 상태에서 당뇨약을 복용한 게 원인이었다.

그 밤에 수시로 간호사들이 병실에 들러 손끝을 따서 혈당을 재는데 너무나 불규칙하게 수치가 오가서 불안한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금요일 아침이 되자 많이 안정이 되었고 장염 증세도 많은 차도를 보였다.

금요일 , 내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휴스턴에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많이 망설여졌다.

다들 직장에 다녀 엄마를 간호할 사람이 없는데 내가 꼭 가야 하는가?

비행기 표까지 사두고 딸 따라 미국에 간다고 들 떠 있는 엄마를 두고 나 혼자 가야하는가?

여러 가지 생각들이 겹쳤으나 엄마는 이미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고 ,좋아졌다고는 하나 오랜 시간의 회복기를 가져야 하는 엄마를 모시고 그 먼길을 떠날 수는 없었다.

며칠간 연기할까 했는데 역시 달라스에서 휴스턴까지 오는 비행기 좌석이 없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난 다시 인천 공항을 떠나 내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짧은 한국 방문에 너무나 마음만 아프다 왔다.

특히 엄마를 모시고 오지 못한 게 더더욱 그렇다.

밖에 나가거나 여행 다니는 걸 천성적으로 너무나 싫어하신다.

그런 엄마가 우리 집에 오시고 싶어했다.

작년 환갑에 동갑 계에 나갔는데 누구는 자식이 보내주어서 미국 갔다오고 누구는 캐나다 갔다오고 자랑들을 하는데 아무 소리를 못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다른 집 자식들보다 다들 훌륭하게 키워서 혼자 몸으로 다섯 자식 모두를 4년제 대학을 마치게 했고 졸업해서도 누구 부럽지 않게 당당한 직업을 가진 자식들을 두고 ,자식들로 인해서는 어느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고 큰소리 낼 수 있는 엄마로서는 자존심에 굉장한 상처를 받은 것이다.

그 자존심을 만회하고 싶어했는데 ....

그 것이 제일 마음에 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