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 수요일
직장인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것 말고는 항상
잔잔하고 큰 기복 없이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의 일상이 서울에서 출장 온 사람이 있으면 단번에 깨져 버린다.
지난 일요일 서울에서
중역들이 출장을 와서 남편이 시카고까지 나가서 같이 일하고 몽고메리 들러서 일하고 그 중에 젊은 전무님 한 분만 모시고 휴스턴으로
돌아왔다.
주재원들은 본인의 맡은 일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서울에서 온 상사들의 의전임무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기에
실수하지 않도록 아침에 수시로 시외 전화해서 깨워주는 것을 내 임무로 알고 있다.
화요일 저녁 젊은 전무님 한 분만 모시고 휴스턴에
돌아왔다.
개인적으로도 여러 번 본 적이 있는 중역이었기 때문에 인사라도 드리는 게 나의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전화가
왔다.
술을 많이 마셨는지 운전을 못 하겠다며 나오라고 했다.
남편은 휴스턴에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중역 한 분만 있다는
편안함, 그리고 운전할 내가 왔다는 사실에 그만 정신을 놓아 버렸다.
술을 마셔도 그리 실수를 안 하는 사람인데 왜 그렇게 긴장이
풀려 버렸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당연히 운전을 내가 해서 출장자를 호텔에 모셔다 드렸는데 체크인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출장자 혼자서 들어갔다.
다음날 아침까지도 비몽사몽 하더니 정신이 들고나서는 너무 황당한 실수에 의기소침해져
있다.
나의 어떤 위로도 먹히지가 않아 나도 너무 속상하다.
남자들은 그렇게 술을 마셔대야 사업이 되고, 접대가 되는
건지 정말 모르겠다.
미국의 직장문화가 부러울 뿐이다.
6월 12일 목요일
정들었던 사람들과
헤어지는 일은 언제나 슬프다.
남편은 2001년 12월 15일 그렇게 바라던(사실은 내가 더 원했던 바이다.) 해외지사 발령을 받아
휴스턴에 부임했고 김 과장님은 보름 늦게 2002년 1월 2일 이곳에 왔다.
그리고 김과장 댁 나머지 가족과 우리가족은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휴스턴에 도착했고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서로 의지해가며 새로운 미국 생활을 꾸려 갔다.
아이들도 같은 또래여서
서로 오가면서 친한 친구가 되기도 했다.
김 과장 댁 부인은 매사에 저돌적일 만큼 적극적이어 어느 면에서는 내가 많이 도움을 받기도
했다.
섬머 스쿨에도 어느 교회에서 언제 무슨 프로그램이 있는지 줄줄 알고 있어 나는 힘들이지 않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는데 과장님이 지난 2월 몽고메리 알라바마로 발령을 받았다.
공장을 짓는데 첫 삽을 뜨고
있는 상황이라 하루 24시간으로도 모자라 가족들에게 신경 쓸만한 여건도 안되고 아이들이 아직 학기중이라 같이 갈 수는
없었다.
아이들 방학과 함께 어제 이삿짐을 싸고 송별회를 하는데 가슴 한 쪽이 시리다.
아이들끼리도 많이 정이 들어
울면서 알라바마에 가지 않겠다고 하고, 언니 오빠랑(우리 아이들을 지칭함) 같이 가자고 했다.
헤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위해 두
가족이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새벽 5시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라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그 곳에서도 힘차게
적응하며 잘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며 그들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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