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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의 내 어머니의 삶

김 정아 2023. 11. 23. 04:24

노후의 엄마의 삶은 참 행복한 편에 속한다.
술 , 친구, 노래 좋아하는 농사 짓는 남편을 만나 젊은 시절 고생을 참 많이 하셨다.
친정 아버지는 농사 욕심이 많으셨고 머리도 좋으셔 남들 안 하는 농작물을 지으셨고 때와 운이 따라주지 않았는지 하는 일마다 실패를 하셔서 빚을 많이 지셨다.
빚도 많은데 또 밭을 많이 사들여 엄마의 젊은 시절은 빚쟁이에게 시달리는 삶이었다.

아버지는 자식 교육에도 열성적이어서 큰 딸인 내게 꼭 대힉은 들어가야 한다면서 내 성적에도 관심이 많으셨다.
중학교 때 내가 받았던 성적과 달리 낮은 성적표가 나오자 바빠서 학교는 직접 못 오시고 편지를 정성껏 써서 담임선생님께 드려 성적표를 다시 수정 받기도 했다.
시골에서 농사 짓는 아버지치고 아는 게 많아 친구들이 부러워 했는데 그 아버지가 맏이인 내 대학 등록금 한 번 내 주시고 위암으로 세상을 뜨셨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지 ,빚은 세상 천지 억수로 깔렸지 ,자식들은 대학 1 년생부터 줄줄이 5명이나 되지 ,40 중반의 엄마가 세상을 살아내기엔 너무나 힘겨웠다.
감기에 갈려도 약 한 번 못 먹고 밭에 비료를 뿌리던 모습,
꼭두새벽부터 남의 밭에 일을하고 나서 받아온 품삯이 감자 한포대였던 기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아담한 몸으로 남의 집 밭일을 하려면 술의 힘이라도 빌려야해서 막걸리를 마셔가며 일을 해야했는데 그 때 당뇨를 얻으신 것 같다고 하신다.
그런 젊은 날의 엄마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몸이 부서져라 남의 일도 다니고 ,있는 밭 모퉁이 좀 잘라 팔아가며 자식 5 명을 다 4 년제 대학을 졸업시키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중등교사가 되면서부터는 동생들의 등록금이나 생활비를 어느 정도 충당해주고 ,그 이후로 동생들이 대학 졸업하면서 바로바로 취직을 해 엄마의 고생도 끝나갔다.

지금 80이 넘으신 우리 엄마 말씀이다.
“ 나 젊었을 때 고생은 징글징글 했어도 늙어서 나처럼 편하게 사는 사람 없다.
느그 아빠가 밭 산다고 빚 얻어서 빚쟁이들한테 쫒겨 다녔어도 지금은 그 밭 덕에 내가 편하게 밭 세 받아가면서 살잖냐!
그리고 너그 아빠를 만나서 내 새끼들 다섯 ,누구 하나 못 사는 자식 없이 산다.
내 자식들보다  잘 살고 잘 가르친 사람 내 주위 아무도 없다”
하신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이 우리 엄마에게는 딱 맞는 말이다.
지금은 경제적으로 풍요해 나는 한국에 오면 어떻게 된 게 엄마한테 용돈을 받는다 .
“ 내가 엄마보다 더 부자야 !내가 왜 엄마한테 용돈을  받어 . 웃겨도 너무 웃겨! ” 하면 그냥 주고 싶어 그러신다니 기쁘게 받는다.
내 딸 결혼식에 엄마한테 축의금 5백만원 받았다 .
자식들 모여 외식하면 꼭 밥값을 엄마가 내신다.

지금 중증의 건망증과 초기 치매 사이에서 오가고 있다.
그런데 지난 달에 정기 치매 검사에서 점수가 1 점이 높게 나와 관리를 잘 하셨다고 의사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으셨다.
하루를 지내고 보니 1년전의 엄마와 지금의 엄마는 상태가 같다.
나빠지지 않으셨다.
당뇨가 있으시나 관리를 잘 하셔서 아무 이상이 없고 ,무릎상태가 좋으셔 걷는 것은 또래의 누구도 따라 올 수 없다.

난 이만하면 내 어머니의 일생에 큰 박수를 드린다.
누구보다 힘들고 가난한 젊은 삶을 사셨지만 노후의 내 어머니의 삶은 성공이다.
그리고 난 내 어머니를 세상의 누구보다 존경한다.

전화를 할 때마다“우리 딸 ,사랑해!” 라는 말을 “ 우리 엄마 , 사랑해” 라는 말로 돌려드린다

*아직도 예쁩니다
신발 자랑하고 있어요

*색칠 공부에 열중이십니다